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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 그리고 유대인들의 비판

by startedstar 2025. 3. 18.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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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독일 출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쓴 책으로, 원제는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이다. 1963년에 출간되었고, 아렌트가 직접 예루살렘에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뒤 쓴 보고서 형식의 저작이다.

 

 

1. 한나 아렌트, 20세기 정치철학의 거장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이다. 독일 하노버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아렌트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제자로 철학을 공부하였고,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활발한 학문 활동을 이어가며 현대 정치철학의 기틀을 마련한 학자이다.

아렌트는 인간 조건, 권력, 전체주의, 악의 본질 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남겼다. 대표 저서로는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혁명론』 등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를 세계적으로 가장 뜨겁게 논쟁의 중심에 세운 책이다.

특히 그녀는 인간의 자유와 정치적 행위를 강조하며, 인간이 정치적 존재로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공적 영역’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아렌트는 정치권력과 폭력의 차이를 날카롭게 구분하였으며, 근대 국가의 전체주의적 경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2.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을 말하다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핵심 인물,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전범 재판이 열렸다. 뉴요커(The New Yorker)의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직접 취재한 아렌트는, 이를 바탕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를 1963년에 출간하였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아이히만의 ‘개인적 악마성’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히만을 끔찍한 ‘괴물’로 인식했으나,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철저하게 일상적이고 평범한 관리였다. 그는 재판장에서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도덕적 자각이 결여된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악이란 반드시 사디스트나 괴물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 없이 주어진 규칙과 명령을 따르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포기하는 순간, 누구나 거대한 악의 체계에 복무하게 된다는 경고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자신의 역할을 ‘행정적인 일’로만 여겼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관여하면서도, 이를 단지 ‘효율적인 수송과 인력 배치’ 문제로 접근했다는 점은 현대 관료주의 시스템의 비인간성과 맞닿아 있다고 분석하였다.

 

3. 유대인 사회의 반발과 비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간되자, 전 세계적인 반향과 함께 유대인 사회 내부에서도 거센 비판이 일었다.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라는 집단적 비극을 다루면서도 기존의 감정적인 피해자 서사에서 벗어나 철저히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당시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3-1. 아이히만의 악을 평범화했다는 비판

유대인 공동체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악마적 인물로 묘사하기보다는, 단순한 ‘평범한 인간’으로 해석한 데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아이히만은 명백한 ‘살인자’이자 ‘악의 화신’이었다. 그런데 아렌트는 그를 특별히 악마적인 인물이 아닌, 체계에 순응한 관료로 묘사하였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서술이 아이히만의 범죄를 상대적으로 희석시키고, 그의 책임을 구조나 시스템으로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지적하였다.

3-2.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

아렌트는 책에서 나치와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 사이의 협력 관계를 언급하였다. 나치의 유대인 이송 작업에서 유대인 평의회가 일정 부분 협력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 부분은 아렌트가 피해자인 유대인 사회 내부의 도덕성도 비판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유대인 사회의 분노를 샀다.

특히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에게 있어, 외부의 압력 속에서 행동한 공동체 지도자들마저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아렌트의 시선은 지나치게 냉혹하게 여겨졌다.

3-3. 피해자 감수성에 대한 결여

아렌트의 분석은 고도의 정치철학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사회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단지 정치 시스템의 문제로만 볼 수 없었다. 피해자들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감정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렌트의 책은 피해자의 심정에 대한 공감보다는, 철저히 ‘악의 메커니즘’에 집중한 저술로 읽혔다.

 

4. 오늘날의 재조명

출간 당시에는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시간이 흐르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20세기 이후 등장한 여러 전체주의 국가들과 관료주의 시스템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은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아렌트의 주장은 ‘아이히만’이라는 한 개인을 넘어서, 오늘날 사회 속 조직화된 악, 책임 회피형 관료주의, 무사유한 복종 등 여러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만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단순한 전범 재판 기록을 넘어서 **‘현대인의 도덕성과 책임’**을 묻는 철학적 저작으로 자리 잡았다.

 

5. 결론

한나 아렌트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은 어느 순간에도 ‘생각하는 존재’로 남아야 하며, ‘악’은 특별한 괴물이 아닌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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